▣ 목차
◈ 추리소설, 그리고 모든 형식의 이야기의 규칙
(1) 등장인물이 직면한 모든 문제는 모든 독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중요해야 한다.
(2) 주요 인물은 전편에 걸쳐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3) 앞으로 벌어질 사건은 암시되어야 한다.
(4) 모든 인물은 각자의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상의 규칙은 추리소설이 갖춰야 할 장치인 동시에, 모든 형식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한다. 다음 내용에서는 각 규칙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등장인물이 직면한 모든 문제는 모든 독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중요해야 한다.
반드시 범죄가 발생해야 한다. 범죄가 발생해야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정의가 지켜지기를 바란다.
여기 술 마시고 총질하며 깽판을 친 카우보이들이 있다. 이들이 정말로 술주정뱅이에 불과하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처벌을 받든 말든 관심을 안 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총질이 의도적이었다거나, 카우보이들이 범죄자였다면, 독자는 그들을 잡아 정의를 구현하기를 바랄 것이다.
(2) 주요 인물은 전편에 걸쳐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범죄자는 글의 초반에 나타나야 한다. 물론 살인자의 정체는 감추어야 한다. 그러나 글의 후반부에 난데없이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를 살인자라고 밝혀서는 안 된다. 사건의 원흉은 글의 상당부분에 걸쳐 등장해야 한다.
(3) 앞으로 벌어질 사건은 암시되어야 한다.
작가는 정직해야 한다. 인물의 특징 뿐 아니라, 인물간의 심리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 공개해야 한다. 독자는 또다른 주인공이므로, 주인공이 알아야 하는 사항은 독자들도 알아야 한다.
(4) 모든 인물은 각자의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형사는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고, 범인은 형사를 물먹이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 상대의 존재감 부재
요즘 한창 진행 중인 망생이의 습작.
<위기- 극복>이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시작해, 시퀀스 분석을 통해 어떤 내용으로 갈 것인지 방향성을 잡고, 지금은 그 방향성에 따라 세부 줄거리 = 정확하게 말하면 장면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전개 - 위기까지는 정리가 끝난 것 같고, 절정 - 결말 부분은 대략적인 이미지는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어디로 갈지 골라서 문자화하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에, 초반부는 아직 시퀀스 설정 당시의 간략한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통 결말 부분부터 구상(다른 말로는 망상)을 하기 때문인지, 늘 초반부 설정이 불확실합니다. 이번에 위기- 극복이라는 제멋대로 작법구조를 생각해 낸 것도, 초반부에 집어넣을 구체적인 이미지가 안 떠올라서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지금은 뒤에 전개된 내용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설정이 비교적 뚜렷해져서 이제 초반부의 상세한 줄거리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때 퍼뜩 떠오른 것이 "악당"의 존재였습니다.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에서 보면, 규칙 2번에 나와 있지요. "악당은 초반부부터 등장해야 한다."
음.
작법서는 몇 번을 읽어도 내용을 계속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만, 규칙 2번만큼은 머릿속에 늘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초반부 상세 줄거리를 작성할 때, 악당의 존재를 제대로 보여주고자 의욕에 가득 찼습니다.
그랬는데.
문제는 초반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암약하는 악당"이 나옵니다. "암약"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평소에는 수면 위로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자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꼬리를 잡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까지는 주인공들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돌아보니 위에서 말한 전개 - 위기 부분의 플롯 = 상세 줄거리는 (당연하겠지만) 대부분 주인공들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내용입니다. 주인공들 눈에 안 띄게 악당이 활동하는데, 주인공들 시선만 따라간다고? 이러다가는 자칫 작중 내내 등장이 없다가, 정체가 밝혀지는 그 순간에야 "뿅" 하고 얼굴을 드러낼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직 이 '암약하는 악당'의 '암약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집니다. 그러고 보면 상세 줄거리에 (구상 중) 이라고 써 놓기도 했고 말이지요. 흠. 이건, 초반부만이 아니라, 정체가 밝혀지기 단계까지는 어느 정도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내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암약하는 악당"이 아니라, "뜬금포 악당"이 될 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규칙 4번에 악당도 근면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배트맨 비긴즈>의 조커를 보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라고 평가하는 말이 있었는데요. 주인공 눈에 띄든 안 띄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듯싶습니다.
◈정리하기
상세줄거리를 짜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알아차려서 다행입니다.
본래 초고의 내용은 적은 것보다는 많은 편이 낫다고 합니다. 퇴고 과정에서 쳐내는 것이 나중에 끼워넣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지요. "암약하는 악당"의 존재감을 생각하지 못했더라면, 줄거리 다 짜놓고 거기에 꾸역꾸역 어떻게든 욱여넣으려고 고생을 했을 겁니다.
적어도 전개와 위기 부분은 상세 줄거리를 다 구상했다고 했는데, 다 하기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